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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자녀 교육법

마태복음 5:3-6

by 책 읽어주는 아빠 2024. 5. 2.

가난한 자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난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3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 거지라는 뜻이에요. 고난을 받아 힘들어하고 고통당하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누구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뜻해요. 4, 5, 6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애통하는 자는 슬퍼하는 자죠. 가난으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이에요. 온유한 자의 더 정확한 뜻은 겸손한 자에요. 히브리어로는 3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같은 뜻이에요. 사람이 가난하게 되면 갖게 되는 태도가 겸손이죠. 가진 것이 없어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자신에게 의가 없는 사람을 뜻하죠. 하나님 앞에서 보여줄 의가 없어요.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3~6에 나오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에요. 가진 것이 없어서 슬퍼하고, 고통받고, 자신에게서 나올 것이 없는 비참한 상태에 놓인 사람이에요. 가난한데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에요.

 

영적으로 가난하든, 물질적으로 가난하든, 가난한 것은 자랑 거리가 아니죠. 가난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아요. 가난하면 자신감도 없어지고, 자신이 원하는 뜻을 이룰 수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가난한 자는 계속 받아요. 천국을 받고, 위로를 받고, 땅을 받고, 배부르게 된데요. 가난한 자는 왜 복이 있는 사람이고, 왜 받을까요? 왜냐하면 가난한 자는 자신의 것이 없으니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하거든요. 구걸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채워주세요.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 받는 것이 있어요.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누가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까요? 아무나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요. 아무나 하나님께 가서 찾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죠. 하나님께 구하면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만 구해요. 그렇게 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고, 받을 수가 있게 되죠.

 

그러나 이 원리에서 우리가 한 가지 빠뜨린 게 있어요. 바로 사람의 죄를 적용시키지 않았어요. 영적으로 가난하다고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나요? 절대 찾아가지 않아요. 물질적인 거지도 쉽게 사람에게 찾아가서 구걸하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거지(beggar)라고 부르지 않고, 노숙인(homeless)이라고 부르죠. 왜 노숙인이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노숙인은 길에서 잘 뿐이지, 구걸은 하지 않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료급식소에 찾아가서 밥 먹을 수 있어요. 노숙인들은 이것도 자신들의 권리라고 믿지,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이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면 이들은 무료급식소도 가지 않을 거예요.

 

제가 동대문에 있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이나 음식을 나눠주면 꼭 사람들은 싸워요. 사람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저에게 싸움을 걸기도 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빨리 안 준다고 싸움을 걸어요. “빨리 줘. 집에 가게. 뭐하는 거야?교회가 쌀을 준다고 했으면 고맙게 받아 가면 되는데, 빨리 주지 않는다고 오히려 싸움을 걸어요. 이들은 받는 것도 권리인줄 알고 받지,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받은 물건을 수퍼마켓에 들고 가서 돈이나 술로 바꿔요. 이날은 동네에서 술판이 벌어져요. 이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렇다는 거예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로 인해서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도 못한다는 거예요.

 

영적 거지든, 물질적인 거지든, 사람은 가난해도 하나님의 도움도, 사람의 도움도 원하지 않아요. 지난 시간에도 말했죠?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찾아오는 원리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는다고요.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혜로운 방법으로 사람에게 찾아오실까요?

 

다윗을 볼게요. 다윗은 이스라엘이나 기독교에서만 유명한 사람이 아니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요. 다윗의 업적과 다윗의 믿음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서의 첫 사역이 골리앗과 싸운 일이에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다윗만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어요. 다윗은 용감하고, 믿음이 특별해요. 골리앗 앞에 가서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죠.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 너와 싸우겠다.다윗은 자신의 싸움 실력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골리앗과 싸우러 갔던 거예요. 그리고 이겼죠.

 

전쟁 영웅이 된 다윗이 백성들의 인기를 받고 있으니, 사울 왕은 다윗이 미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 사울 왕에게서 도망을 치다,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어요.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깃을 잘랐어요. 다윗의 이런 행동은 사울 왕을 용서해준 것을 알려주려고 한 행동이죠. 더 이상 자신을 쫓아와서 죽이려고 하지 말라는 표현이에요. 이것도 대단한 결정이죠.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의 옷깃을 자른 것으로 마음이 찔렸어요. 그는 이렇게 고백하죠.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다.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죠. 다윗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면 남는 것이 없어요. 다윗이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는 믿음의 사람이에요.

 

그런 믿음의 사람인 다윗이 밧세바를 보았고, 그를 왕궁으로 데려와 동침했어요. 밧세바는 임신을 하였고,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렸죠.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왔어요. 휴가를 준 거죠. 그런데 우리아는 집에 가서 밧세바와 시간을 보내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다윗은 자신의 죄, 밧세바와 동침하고 밧세바의 배속에 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기인 것이 들통이 날까봐 우리아를 죽이라고 명령했어요. 요압은 우리아를 불러 전쟁터 제일 앞에 세웠고, 우리아는 그곳에서 싸우다 죽게 되요. 그리고 다윗은 남편이 없는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리죠.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고,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온 기간은 최소 2개월은 넘었을 거예요. 그 시간동안 다윗은 단 한 번도 회개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의 죄는 점점 커져갔어요. 간음, 거짓말, 살인 교사(conspiracy to commit murder), 도둑질. 다윗은 자신의 왕의 권력으로 이런 무자비한 죄를 쉬지 않고 저질렀던 거죠.

 

그렇게 믿음이 좋았고, 회개를 잘하던 다윗은 자신이 죄를 저지르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그러니 회개할 마음도 없었죠. 이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요.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하니, 다윗은 그제서야 회개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내용을 기록한 성경이 시편 51이에요. 3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다윗은 죄로 태어났고, 죄만 바라보고 살았던 지난날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요. 1-2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7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이 알려주는 죄를 들었기 때문에 이런 회개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에요.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한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감히 왕인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저 나단을 죽여 입을 벌리지 못하게 하라.” 이 명령을 내려 나단을 죽일 수 있었죠. 아무런 죄도 없었던 우리아라는 충성스러운 부하도 말 한마디로 죽였는데, 자신의 죄를 지적한 나단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죠. 자신의 죄를 들었다고, 죄를 안다고 사람이 회개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다윗은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죄를 깨달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해요.

 

어떻게 다윗은 회개할 수 있었을까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죄를 알지도 못했던 다윗이 어떻게 죄를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다윗의 고백에 그 답이 나와요. 시편 51:10-11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다윗의 영혼을 새롭게 하셨어요. 성령 하나님이 다윗에게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회개할 수 있었던 거예요. 다윗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다윗이 회개를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해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가난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손 내밀 수 있었던 거예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죠.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거룩한 주님의 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볼게요.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죄에 빠져 산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 성도에게 모든 복을 주셨어요.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되요. 우리가 죄에 빠지는 이유는 내가 죄를 선택하고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어요. “나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고, 나의 악행은 내 죄로 하는 것이다.이 말에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나요? 내 속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선을 행하고, 거룩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는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구하고, 받을 수 있어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 이 단어를 더했죠. “예수님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 때문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이번 한 주도 예수님 때문에 복 받는, 승리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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