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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자녀 교육법

마태복음 5:7

by 책 읽어주는 아빠 2024. 5. 7.

긍휼히 여기는 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사람은 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도 바꾸시고, 모든 일을 하시면 사람이 하는 건 없잖아. 그럼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그냥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겠어?지난번에도 설명 드린 펠라기우스, 세미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주의는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때문에 사람이 만든 거예요. 크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만든 교리이고, 사람의 죄로 만든 교리에요. 그래야 이해하기가 쉽거든요. 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니, 높으신 하나님을 죄인의 수준으로 낮춰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펠라기우스적인 세상 종교,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인 로마 카톨릭이나, 교회 안의 많은 성도가 추종하는 알미니우스주의로 신앙 생활을 하면 너무 편하고, 쉬워요. 사람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해가 잘 되요. 그래서 전도하기도 쉬워요. “교회에 나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해질거야.” 이 말과 너는 죄인인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어.” 이 말 중에 어느 말이 듣기에 편하죠? 앞의 말이 듣기 편하죠.

이해도 잘 되죠. 이 말이 죄인의 마음과 생각에 딱 맞거든요. 또 이런 곳에서는 사람의 열심과 노력을 응원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데 동기부여도 잘 되요. 그래서 이런 교회는 역동적이에요. 움직이고, 뭔가를 하려고 해요.

 

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권위를 강조하면 사람들은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칼빈주의, 개혁주의를 따르는 장로교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새벽 기도에 나오고, 주일 예배에 잘 나오면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죠. 전도나 선교를 하지 않아요. 한다고 해도 돈 전하는 것 외에는 하지 않죠. 교회에서 행사라고 하면 성도들끼리만 할 수 있는 세미나, 교육, 소풍 이런 것만 하죠. 남을 평가하는 것은 잘해도, 사랑할 줄은 몰라요. 그렇게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설교를 들어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를 못해요. 오늘날 장로교회의 가장 큰 죄는 이기주의에요. 자신의 시간과 돈을 쓰려고 하지 않아요. 오직 나의 안정, 나의 미래, 나의 돈에만 관심이 있어요. 하나님과 이웃에게는 관심 없어요.

 

이런 장로교회에 출석을 해도 성도들끼리 친하지도 않아요. 그냥 얼굴만 볼 뿐이에요. 집에 가면 교회, 목사, 장로를 욕하고, 흉보는 말만 해요.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를 둔 자녀는 교회를 좋아할까요? 절대 좋아하지 않죠. 그러니 자녀가 대학교만 가면 교회 나가지 않아요. 예배드리지 않아요.

 

그럼 장로교회는 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걸까요? 아니에요. 바른 교리를 들어도 사람은 자신의 죄로 그 교리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죄의 결과가 생기는 거예요. 장로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절대 주권은 성경에서 시작했어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바울은 목숨을 바치면서 일하고, 헌신을 하고 뭐라고 말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바울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 자기가 일하지 않았데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했다는 거예요.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일을 많이 하는 실천가였어요.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되요.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해서 나와요. 이 말씀을 보통 어떻게 이해하죠? “그래. 나는 성도이고 하나님을 믿으니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만나야 돼.” 이렇게 이해하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긍휼은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긍휼은 하나님의 것이에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긍휼이에요. 긍휼의 시작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에베소서 2:4-5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긍휼히 여기셨죠?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살리셨어요. 이것이 긍휼이에요. 우리가 살려달라고 요청했나요? 우리를 살리시는데 나의 노력이 1%라도 들어가 있나요? 아니에요. 우리는 살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고, 우리의 노력은 1%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긍휼은 행동이에요. 죄인이 이 세상에 속해있고, 죄된 행동만 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이에요. 긍휼은 생각이나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불쌍한 사람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그 사람에게 긍휼이 있는 게 아니에요. 불쌍한 표정을 짓고, 말만 하고, 마음만 있다고 긍휼한 게 아니라고요. 야고보서 2:15-17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배고픈 사람에게 아무리 선한 말을 하면 뭐해요? 그 사람에게 아무 필요도 없는 말이죠.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 자비를 베푼 행동이고 이것이 긍휼이죠.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말만 하는 그 말은 거짓말이에요. 말만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에요.

 

하나님이 죄로 인해 죽는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해요. “불쌍해. 죄 짓지 마. 그러면 안 돼.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런 말을 했어요. 그럼 죄인이 구원을 받나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죠.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십자가로 죽이셨고, 무덤에서 부활시키신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희생을 치러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거죠. 이 긍휼을 받은 사람만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거죠. 성도가 곧 긍휼히 여기는 자에요. 디모데전서 1:16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이 바울에게 긍휼을 베풀면,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면,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바울의 인생을 보면 정확하죠. 바울은 예수님에게 받은 은혜를 아시아와 유럽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았어요. 긍휼을 베푸는 인생이죠. 긍휼을 베풀다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매를 맞아도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긍휼을 베풀었죠. 바울은 왜 이런 어리석은 것 같은 인생을 살았을까요? 바울은 그런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했어요. 죄인 중에 괴물 죄인인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준 것을 깨달으면,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질문을 던져봐야겠어요. 왜 이렇게나 다를까요? 바울도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 받았는데, 바울은 희생하면서 살았고, 우리 장로교회 성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긍휼을 베풀려고 하지도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까요? 왜 장로교회는 사랑이 없을까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갔을 때, 한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어요. 예수님은 이 사건을 시몬에게 해석해주세요.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면서 죄를 용서해주시나요? 아니죠. 예수님은 모든 성도의 죄를 똑같이 용서해주세요. 사함을 많이 받은 성도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말은, 사함을 받은 정도가 크냐? or 적으냐?”, 사랑하는 정도가 크냐? or 작으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죄 용서를 받은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지 못해서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받았냐?, 받지 못했냐?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루하루를 살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동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죄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거죠.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긍휼을 받지 못했다는 거죠. 10,000 달란트(60,000,000 데나리온) 빚진 종이 있어요. 주인은 종이 불쌍해서 10,000 달란트 빚을 없애줬어요. 그런데 이 종은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을 빌린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돈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뒀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종을 불러 이렇게 말했어요. 마태복음 18:32-34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그러면서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이 말도 잘못 이해할 수가 있어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줘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종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무시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요.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거예요. 그 결과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거죠. 그 벌은 영원토록 받는 벌이죠. 로마 카톨릭은 이 말씀으로 연옥설을 만들었는데, 당연히 틀린 말이죠. 10,000 달란트는 연옥에서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라, 평생 갚을 수 없는 돈의 액수를 말해요. 지옥 형벌을 말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요.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받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사람. 내가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달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상을 주세요. 본문 말씀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하나요? 하나님으로부터 또 긍휼히 여김을 받는데요.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누리며 살면 그 긍휼은 더욱 풍성해져요.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지옥 형벌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오죠.

 

여러분은 긍휼히 여기는 자인가요? 이웃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듯이 그 이웃을 보면서 긍휼한 마음이 생기나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과 같이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 전하는 행동을 하셨나요? 이번 한 주는 나의 믿음, 나의 행동에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이 있는가에 대해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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