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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자녀 교육법

마태복음 4:18-22

by 책 읽어주는 아빠 2023. 12. 15.

나를 따라오라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동시에 제자를 부르셨어요. 이 제자는 사도죠. 사도는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특별하게 부르신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사도에요. 

오늘 말씀만 보면 예수님이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처음 만나서 부르신 것 같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 만난 적이 있어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어요.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으로 제자를 부르지 않으셨죠. 이 세상에서는 유능한 선생이 제자를 어떻게 선별하나요? 먼저 제자가 선생을 찾아가죠. 그러면 선생은 그 제자를 테스트해서 통과해야 제자로 받아줘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찾아가서 부르시죠. 제자를 부르시는데, 머리가 똑똑하거나 이름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게 아니라, 하찮은 직업인 어부들을 부르셨어요. 왜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지 아세요? 왜 예수님은 무능한 것 같은 사람을 부른지 아세요? 예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전능하시니 사람의 능력을 볼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부르시는데 어부들의 반응도 신기해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더 유능한 선생이에요. 그런 예수님이 부르시는데 거절하지 않아요.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해요. “나는 예수님 같이 높은 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똑똑하지 않아요. 나는 잘 못해요.” 이런 말을 하겠죠.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일했던 직업도 버리고, 가족과 재산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어요. 20, 22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제자들은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왜 자기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왜 자신의 수준을 모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장 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어요. 예수님이 우선인 사람은요, 자신을 보지 않아요. 나의 능력을 보지 않아요. 나의 판단도 믿지 않죠. 예수님만 믿어요. 예수님의 말씀만 순종할 뿐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거든요.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아침에 그물을 손질할 때, 예수님이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하죠. 그 말에 순종하여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잡혔어요. 우리는 어부가 아니니 잘 모르는데 어부인 베드로는 깨달은 거예요. ‘이 분이 말씀하시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되는구나. 예수라는 이 사람은 전능하신 분이구나. 이 분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구나.’ 그런 예수님에 대해서 깨닫고 자신을 보니 죄인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죠. “주여 나를 떠나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거죠.

반면 예수님이 우선이 아니라, 나 자신이 우선인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저는 잘 못해서 하지 않을래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못해요. 그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에요. 싫어요.” 자신이 우선인 사람은 겸손한 것처럼 말해도, 그 말이 얼마나 교만한지 몰라요. 모든 일에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거죠. 이런 사람은 절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10:37-38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잘하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도구로 쓸 사람을 부르세요. 예수님의 도구가 되려면 예수님이 가장 우선이고,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사도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죠. 사도는 교회를 세우는 사람,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와 틀려요. 그러나 같은 것도 있어요.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교회로 부르신 것은 똑같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불러서 무엇을 하도록 하셨죠?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 우리를 세우셨어요. 이것이 같아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사도가 예수님께 한 순종과 똑같은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죠.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사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도라면, 예배자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러나 교회의 성도는, 예배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 사명에 최선을 다할까요? 어떤 성도는 예배 시간에 늘 자요. 목사님은 이런 사람이라도 믿음 잃지 말라고 격려의 말을 해주죠. “주님의 은혜로 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리는 대로 믿으면 안되요. 예배시간에 자지마라고 하는 말이에요. 

예배 시간에 자는 그 성도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을 해볼게요. 왜 예배 시간에 잘까요? 예배를 준비하지 않았으니 자는 거예요. 예배 시간에 자는 사람은 그 전날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거죠. 그럼 전날 빨리 자도록 준비를 해야죠. 잠이 안 오면 하루 종일 달리기를 하면 되요. 그러면 잠이 잘 와요. 그래도 예배시간에 잔다면 송곳을 가지고 허벅지를 찔러야 되요. 피가 흐르도록 찌르면 자라고 해도 못 자요. 예배 시간에 자는 사람들은 이런 작은 노력도 하지 않으니 거룩한 예배 시간에 자는 거예요. 예배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앉아있으니 자는 거라고요. 예배를 우습게 여기는 거죠.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것보다 준비하지 않죠.

작년에 이주민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이 금요기도회에서 설교를 하셨어요. 그러면서 필리핀 청년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2020년 코로나가 한창 유행하던 때에 회사 사장이 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 교회에 가지? 교회에 가지마. 네가 코로나 걸리면 우리 공장 문 닫아야 하니까 교회 가지마. 만약 네가 교회에 가면 해고 시킬거야.” 보통 회사에서 이런 말을 하면 외국에서 오신 노동자는 알겠다고 말해요. 왠지 아세요? 한국에 오기 위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친척들에게 돈을 많이 빌렸거든요. 기본 수 백만 원에서 천만 원까지 빌려서 한국에 와요. 비행기 값, 비자 값,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 하는데, 필리핀 하층민에게는 그런 돈이 없어요. 한 달에 10-20만원을 버는데 천만 원을 어떻게 내요? 그러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한국에 올 돈을 빌리는 거예요. 한국에서 1년만 일하면 빌린 돈을 갚을 수 있고, 온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모험을 해서 한국에 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필리핀 청년이 사장에게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그러면 그만 둘게요. 저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려야 되요.” 여러분 이 청년이 이렇게 말을 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2020년 당시에는 다니던 직장도 짤려서 노동자들이 돈을 못 벌던 때였어요. 이 필리핀 청년이 일을 그만두면 비자가 만료되기 때문에 고국에 가야 되요. 고국에 가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친해서 돈을 빌려줬는데 그 돈을 갚지 못하면 돈 빌린 사람들에게 죽을 수도 있어요. 고국에 가지 않고 불법 체류자가 되더라도 수개월을 일하지 못하게 되요. “회사를 그만둘게요.” 필리핀 청년의 이 말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말이죠. 예배를 위해서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는 거예요.

한국에는 교회가 많고, 누구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예배에 나온 사람들의 믿음은 다 달라요. 예배의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죠. 누구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친척 결혼식이라고 예배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어요. 필리핀 청년 처럼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10:32-3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지미 카터는 미국 대통령이었어요. 1977~1981년까지 대통령 직을 수행했어요. 그런데 지미 카터는 대통령이 그의 두 번째 직업이었어요. 그의 첫 번째 직업이 뭔지 아세요? 교회 주일학교 교사가 그의 첫 번째 직업이었어요. 왜 첫 번째 직업이 주일학교 교사인지 아세요? 그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주일을 빠지지 않았어요.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에도 주일에는 비행기를 타고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 일을 했어요. 지미 카터에게 주일학교 교사는 대통령직 보다 더 소중한가요? 아닌가요? 더 소중했죠. 미국 대통령은 한가한 직업인가요? 미국 대통령은 급한 일이 없었을까요? 주일에 장관이, 의원이 부르지 않았을까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쁘고, 응급한 일이 많은 직업이 미국 대통령이에요. 그럼 지미 카터는 왜 단 한 번도 주일을 빠지지 않았을까요?

저도 주일학교를 섬겨봤는데, 교사가 가끔 주일을 빠져요. 빠지는 이유는 다양해요. 가족여행, 친척 결혼식, 아파서, 직장에 급한 일이 생겨서 빠져요. 주일학교 교사가 빠지면 아이들에 저에게 질문해요. “우리 선생님 왜 안 나왔어요?” 그러면 저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해요. “선생님이 급한 일이 생겨서 못나왔어.” 이렇게 말해도 아이들은 다 알아요. 선생님이 해외여행가서 못 나왔다는 걸요. 결혼식에 가서 못 나왔다는 것을 아이들은 다 알아요. 그러면 아이들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사고가 생기겠죠. ‘결혼식이 있으면 예배 안 드려도 되는구나. 여행가면 예배를 한 번씩 빠져도 되는구나. 약속이 있으면 예배 안 드려도 되는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아이들의 머릿속에 이런 세상적인 생각이 심겨질까봐 늘 주일에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을 거예요. 아이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심겨지면 수년, 수십 년 동안 들은 말씀은 모두 쓸모없게 되죠. 왜죠? 나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이에요. 주일을 지키지 않은 그 교사가 말씀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를 바닥에 던져버렸기 때문이에요. 이런 교사가 있는 교회의 성도는 안 봐도 뻔해요. 다 같이 주일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일 소중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우선이죠. 예수님이 우선이 아니에요. “한 번 있는 일이야. 괜찮아.” 이런 생각을 버리지를 못하는 거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왜 불렀죠? 예수님의 일을 하라고 부르신 거예요. 제자들이 하던 일이 잘 되라고, 고기 많이 잡으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왜 교회로 불렀죠?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불렀어요. 죄인인 나에게 예배드리는 특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예요.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 되고, 돈 잘 벌고, 좋은 직장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에요. 


여기 계신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계세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도구인가요? 예수님이 여러분의 도구인가요? 
예수님이 나의 일을 돕는 분인가요? 내가 예수님의 일을 돕는 사람인가요? 깊이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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