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리뷰

공산주의의 역사

by 책 읽어주는 아빠 2022. 10. 17.

공산주의의 역사

 

* 공산주의적인 생각과 그런 유토피아를 구상한 것은 19세기에 마르크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고대 시대부터 이런 사고는 있어 왔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법률'에서 모든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아내와 아이들까지도 함께 소유하는 사회를 구상했다. 17세기의 존 로크'인간 오성론'에서 이기심을 억누르는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암시했고, 18세기 프랑스 사상가인 엘베티우스는 적절한 교육과 입법을 통해서 인간은 완벽한 덕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덕을 쌓도록 강요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영향을 받아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고안했다. 이 이론은 사유 재산이 없이 평등한 사회는 반드시 생겨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자연 진화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들은 사유 재산의 폐지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 데 있어서 필수 조건이고, 인류가 사유 재산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된 뒤라야 완벽한 자기완성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한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체계화한 공산주의 이론은 제1차 인터내셔널이라고 말하는 국제 노동자 협회의 강령이 되었다. 1차 인터내셔널은 1876년에 해체되었다가, 마르크스 사후 1889년에 소생되어 제2차 인터내셔널로 불렀다. 이 단체는 독일의 사회민주당을 맹주로 삼아 무정부주의자들을 배제시켰고 여러 국가들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결속시켰다.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은 형제이며 그들은 자본주의가 야기한 전쟁을 방지할 막대한 책임을 진다는 신념을 강조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전쟁이 날 경우 "대중들을 선동하여 자본가 계급의 통치를 앞당겨 끝낼 것"을 서약했다. 다시 말해 국가 사이의 전쟁을 계급 사이의 내란으로 변형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계급에 대한 충성심을 눌러 버렸다. 반전 서약을 이행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제2차 인터내셔널의 행로는 통렬할 타격을 입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소속된 국가와 점차 일체감을 굳혀갔다. 사회주의의 국제적 성격을 주장하는 운동은 이제 서구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옮겨갔다. 처음에는 러시아로, 다음에는 비서구 국가들로.

 

 

* 레닌은 독일의 후원으로 러시아의 차르 정부가 무너지자 쉽게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반대자들을 물리치거나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하여 무제한의 테러를 즐겨 사용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무관심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연구를 통해 과거의 모든 사회 혁명이 실패한 것은 중도에서 멈췄거나 적대 계급을 관용하여 생존 후 재편성할 수 있도록 놓아둔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스탈린은 레닌의 판단에 이의를 단 적이 없었다. 레닌은 그런 스탈린을 지적인 동료들보다 앞서 승진시켰으며 1922년에 당 서기장에 임명했다. 처음부터 스탈린은 자신에게 개인적 충성을 바치는 자들과, 당의 리더쉽을 두고 벌어질 권력 투쟁에서 아군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승진시켰다. 레닌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권 투쟁은 곧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 레닌은 공산주의식 어리석은 국가 경영으로 산업, 농업 등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뭄까지 더해져 무려 52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런 어려움들을 이겨내기 보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더욱 옥죄었다.

 

 

* 1923 레닌이 죽고 서기장이었던 스탈린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스탈린은 세 가지의 목표

 

1-강력한 산업

    2-농업의 집단화

            3-국민의 완벽한 단결

 

이 목표에 따라 192915개년 경제계획을 세워 산업을 성장시키려고 했다. 산업 노동자의 숫자는 2배로 늘리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중노동 수용소로 이송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다. 1930-1931년 사이에 1,803,322명이 이러한 처벌을 받았다. 1932-1933년에는 인위적인 기근이 발생했는데 농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군대를 배치했다. 이 재앙으로 600-7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 1934년 걸출한 볼셰비키이자 레닌그라드 공산당 서기장인 세르게이 키로프가 미궁의 상황에서 암살당했다. 상황 증거로 보아 살해를 부추긴 인물이 스탈린으로 보였다.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충성스러운 스탈린주의자로서 그는 스탈린이 "소련과 전 세계 농민의 해방을 위한 위대한 전략가"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키로플는 스탈린이 편하게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당원들의 인기를 지나치게 많이 얻었다. 그를 암살함으로써 스탈린은 두 가지 이득을 보았다. 우선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했다. 다음으로는 겉보기에 반소비에트 음모론자들에 대한 대대적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 당의 위원들과 후보 위원들 중 70%가 스탈린에 의해 처형당했다. 레닌과 친했던 동료들은 체포되고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일단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무너지자 연출된 재판에 끌려나와 가장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들에게 억지로 씌운 범죄 행위에는 간첩 활동, 테러 행위, 자본주의를 회복하려는 시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복을 한 뒤 그들은 처형되거나 중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는 자는 거의 없었다. 레닌은 이른바 유서 속에서 잠재적 후계자로 여섯 명의 지도적인 공산주의자들을 열거했다. 그중에서 스탈린을 빼고 모두 사라졌다. 소비에트 장성에서 역사가로 변신한 드미트리 볼코고노프는 공문서 보관서에서 19381212일의 단 하루에 작성된 30만건의 명부를 발견하고 자신의 말대로 크게 놀랐다. 이 명부에는 약 5000만명의 인명이 들어 있었다. 문서를 살펴본 결과 그들이 명목상으로나마 재판을 받기 전에 스탈린은 그들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음이 드러났다.

 

 

* 1937-1938년간에 106,810명의 성직자들이 예배를 했다는 죄로 총상을 당했다. 1932-1939년간에 소련 인구 9,000,000명이 감소했다. 총리 서리였던 니콜라이 불가닌이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이런 말을 했다. "스탈린의 친구로서 때때로 초대를 받던 자가 막상 스탈린과 함께 앉으면 그는 다음에 집으로 갈지 아니면 감옥으로 갈지 알지 못한다."

 

 

* 대숙청의 한 측면에는 차후 컬트라고 불린 스탈린 숭배가 있었다. 사실상 그것은 사탈린의 신격화였다. 그는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며 오류가 없었다. 신으로 숭배를 받자 스탈린은 점차적으로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자기 왕국의 진정한 상황을 모르게 되었다. 암살이 두려워 그는 국내에서 결코 여행하지 않았다. 그의 참모였다가 마침내 후계자가 된 흐루시초프에 따르면 영화 속에는 집단 농장의 농부들이 칠면조와 거위 요리로 상다리가 휘어지는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 보리스 옐친1989년 미국 여행에서 감동을 받았다. 천편일률적이고 틀에 박힌 공산주의 이념들의 연속적인 붕괴를 경험했다. 휴스턴의 한 슈퍼마켓을 둘러보면서 그는 소리쳤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물자가 풍부하지 못한 거야? 소련의 정권 담당자들은 도대체 우리의 가난한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의 동료가 보기에 이러한 경험으로 옐친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하여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스탈린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옳았다. "공산주의 체제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고위 관리들을 포함하여 국민들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야 한다." 1991년 12월 드디어 소련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 나치주의와 공산주의의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 화해의 여지가 없이 대립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이 두 이념 운동은 격렬하게 다투었지만 동시에 서로 협력했다. 이 둘은 공통의 적을 지녔다. 인권, 사유 재산, 평화를 존경하는 자유민주주의였다. 이 두 전체적 정권은 인간 존재를 새로운 사회 질서의 건설과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위한 소모 재료로 간주했다. 히틀러는 소련이란 나라가 있었기에 크게 득을 보았다. 그는 소련을 한편으로는 유권자들을 두렵게 할 협박수단으로 이용했으며, 한편으로 독재 체제를 형성함에 있어 하나의 본보기로 삼았다. 1932-1933년간에 치러진 중요한 선거에서 승리하여 히틀러는 정권을 잡았다. 선거 캠페인 중 그가 써먹은 구호 중 하나는 소련이 독일을 점령할 수 있다고 유권자들을 위협한 것이었다. 그의 요구에 따라 의회는 베를린 의사당의 화재가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고 탓하며 특별한 권한을 주었다. 곧이어 선포된 국민 보호령은 제3제국이 1945년 무너질 때까지 히틀러의 독재 정치를 보장하는 법적 기반이었다. 이 법령은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그뿐 아니라 재산의 압류 및 재산권의 제한 등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런 조치들은 다른 전례가 없지만 레닌의 러시아를 연구하는 역사가는 익히 보았던 것들이었다. 이 덕분에 지도자 히틀러는 소련의 통치자들이 실제로 누렸던 무제한의 권력을 정식으로 얻었다. 히틀러는 일당 국가의 완성된 모델을 소련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19333월에 포고된 법령에 따라 그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종류의 국가를 전통적으로 전체주의 국가라고 이름 붙였다. 이 용어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자기의 파시스트 정부를 규정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전체주의 국가는 국가와 시민 사이를 구분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는 조직체의 모든 측면들을 낱낱이 살펴보고 통제한다. 또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여당의 도움도 필요하다. 여당은 정치 권력의 독점을 향유하고 무제한의 권력을 지닌 비밀경찰의 협조를 받아 통치한다. 이런 국가에서 법은 개인을 보호하는 수단이 아니라 통제하는 장치이다

 

 

* 19193차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인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서 설립되었다. 이 코민테른의 영향력을 막강했다. 유럽,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에 수많은 공산주의 추종자들을 양산했으며 각 나라에 공산당을 지원하여 혁명으로 공산국가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공산국가가 되어서는 아낌없는 경제적, 군사적, 전략적 지원을 하였다.

 

 

*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을 지원하였다. 마오쩌둥1958년 대약진 운동과 1966년의 문화 대혁명으로 수천만명을 기근과 숙청으로 죽였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은 프랑스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공산주의 군대를 양성하여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였다. 폴 포트는 마오처럼 시간을 들여 인간을 개조하지 않고 처벌만 집행하였다. 그 결과 1975-1978년 단 3년 만에 캄보디아 인구의 25%200만명을 죽였다.

 

 

* 공산주의 흑서의 편집자인 스테판 쿠르투아는 공산주의의 희생자 수를 8500만에서 1억 명 사이로 추정한다. 이 수는 1,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보다 50%나 더 많은 숫자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내부 모순을 겪으며 그것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파과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현실에 민감하고 스스로 조절할 능력이 있었고 또 경험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위기들을 용케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반면 공산주의는 엄격한 원리이고, 유사 종교로 바뀐 유사 과학이며, 정치적으로 경직된 정권 속에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체의 잘못된 개념들을 밝혀 낼 수 없다는 게 증명되었고 결국 유토피아를 스스로 포기했다.

 

 

* 공산주의자들도 공산주의를 정의내리지 못했다. 실현 불가능한 이념이고, 오직 상상 속에서만 작동하는 이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사람 안에 있는 시기, 질투, 살해 욕구 등등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죄의 본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이웃을 죽이고, 국가를 말살시키는 정치 이념."

728x90

'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자녀양육  (1) 2022.10.23
에이트  (0) 2022.10.21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0) 2022.10.12
기독교 세계관에 관하여  (0) 2022.10.11
몰입  (1) 2022.10.10